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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피 샤를로테 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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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피 샤를로테 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녀는 1744년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1761년 영국의 조지 3세와 결혼하여 영국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15명의 자녀를 두었고, 예술과 식물학을 후원하며 큐 왕립 식물원 설립에도 기여했다. 조지 3세의 정신 질환 동안 섭정을 수행했으며, 1818년 사망했다. 그녀의 아프리카계 혈통 논란이 있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과 '퀸 샬럿: 브리저튼 이야기'에서 그녀의 삶이 다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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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피 샤를로테 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37세의 샬럿 여왕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초상화, 1781년
작위영국의 왕비
하노버의 선제후비/왕비
통치 기간1761년 9월 8일 – 1818년 11월 17일
대관식대관식, 1761년 9월 22일
출생일1744년 5월 19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 미로브, 운테레스 성
사망일1818년 11월 17일
사망지영국, , 큐 궁전
매장일1818년 12월 2일
매장지윈저 성, 성 조지 예배당 왕실 지하 납골당
배우자조지 3세 (1761년 9월 8일 결혼)
자녀조지 4세
프레더릭
윌리엄 4세
샬럿
에드워드
오거스타 소피아 공주
엘리자베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오거스터스 프레더릭
아돌푸스
메리
소피아 공주
옥타비어스 왕자
앨프레드 왕자
아멜리아 공주
가문메클렌부르크 가문
본명소피아 샬럿
아버지카를 루트비히 폰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어머니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폰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녀
서명
이름
독일어Sophie Charlotte zu Mecklenburg-Strelitz
종교
종교개신교

2. 초기 생애

샬럿의 출생지 미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공녀 조피 샤를로테는 1744년 5월 19일 미로의 Unteres Schloss|운터레스 슐로스de(하성(下城))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메클렌부르크 공작 카를 루이 프리드리히, 미로 공자(1708–1752)와 그의 아내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틴 공녀(1713–1761)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었다.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북독일의 작은 공국이었다.

카를 공작의 모든 자녀는 미로의 운터레스 슐로스에서 태어났다. 1761년 조지 3세와의 약혼 당시 작성된 외교 보고서에 따르면, 샬럿은 "매우 평범한 교육"을 받았다고 평가되었다. 그녀의 성장 환경은 영국의 지주 계층 딸과 비슷했다. 가정교사에게 식물학, 박물학, 언어 등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교육의 중점은 가사 관리와 종교에 맞춰져 있었다. 종교 교육은 사제가 담당했다. 1752년, 오빠인 아돌푸스 프리드리히 4세가 공작위를 계승한 이후에야 비로소 왕족으로서의 의무와 궁정 생활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3. 결혼과 가족

요한 게오르크 지제니스(Johann Georg Ziesenis)가 그린 하녀와 함께 있는 샬럿, 1761년경


조지 3세가 할아버지 조지 2세의 사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을 때, 그는 22세의 미혼이었다. 그의 어머니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타 공녀와 주변 조언자들은 그의 결혼을 서둘렀다. 그러나 조지 3세는 모후 아우구스타와 총리 뷰트 백작 등의 왕비 선택 간섭을 원치 않아, 독자적으로 시종무관 그레이엄 대령을 독일에 파견해 왕비 후보를 물색하게 했다.

그레이엄 대령이 추천한 인물은 당시 17세였던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의 공녀 샬럿이었다. 샬럿은 중요도가 낮은 북부 독일 공국 출신이었기에 권력 정치나 당파 싸움에 대한 경험이나 관심이 없을 것으로 여겨져 왕비 후보로 매력적이었다. 이는 사실로 드러났고, 조지 3세는 결혼 직후 그녀에게 정치에 "참견하지 말라"고 지시했으며, 샬럿은 이를 기꺼이 따랐다.[5]

1761년 7월, 조지 3세는 의회에 샬럿 공주와의 결혼 의사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후 하코트 백작이 이끄는 호위대가 샬럿 공주를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독일로 출발했다. 이들은 8월 14일 슈트렐리츠에 도착하여 다음 날 샬럿의 오빠인 아돌푸스 프리드리히 4세 공작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결혼 계약서에 서명했다.[6][7] 3일간의 축하 행사가 끝난 후, 8월 17일 샬럿은 오빠와 영국 호위대와 함께 영국으로 출발했다. 8월 22일 쿠스하펜에 도착하여 영국 함대에 올랐으나, 항해는 폭풍으로 인해 순탄치 않았다. 일행은 9월 7일에야 하리치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향했고, 다음 날 오후 3시 30분에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 도착하여 정원 문에서 국왕과 왕족들의 영접을 받았다. 이것이 조지 3세와 샬럿의 첫 만남이었다.[8]

요한 조파니의 작품,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와 그들의 여섯 맏이, 1770년


도착한 지 6시간 만인 그날 저녁 9시(1761년 9월 8일), 샬럿은 조지 3세와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왕실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세커가 집전했으며, 왕족과 독일에서 온 일행, 소수의 하객만 참석했다.[9] 조지 3세와 샬럿의 대관식은 2주 후인 9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조지 3세는 왕비와 함께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즉위 후 1년 넘게 대관식을 미루었다고 전해진다.[10]

왕과의 가정 생활은 원만했으며, 샬럿 왕비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조지 4세, 요크 공작프레더릭, 윌리엄 4세, 켄트 공작에드워드(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하노버 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등 9남 6녀, 총 1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남편의 여성 관계에 관해서도 전혀 고생하는 일이 없었다. 이 중 13명이 성년으로 성장했다. 샬럿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궁정 행사에서도 나서지 않았으나, 자녀들의 불품행에 대해서는 남편과 함께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남편 조지 3세가 자주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자 헌신적으로 간호했으며, 런던을 떠나 윈저 성에서 함께 지냈다.

샬럿 왕비는 예술과 자연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어린 모차르트의 후원자였으며, 런던의 큐 가든 설립에 기여할 정도로 식물을 사랑했다. 또한, 웨지우드도자기를 구입하고 "퀸스웨어(Queen's Ware)"라는 칭호를 허가하기도 했다.

1818년 11월 17일 7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윈저 성 내의 세인트 조지스 예배당에 묻혔다.

3. 1. 자녀

조피 샤를로테는 남편 조지 3세와의 사이에서 15명의 자녀를 두었다.

다섯째 아들 어니스트 오거스터스하노버를 물려받았으며, 그의 남자 직계 후손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어 영국의 왕위 계승권은 박탈된 상태이다. 넷째 아들 윌리엄 4세에게는 사생아 아들들이 있었고, 이들의 후손은 영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름생몰년비고
조지 4세1762년 ~ 1830년영국 국왕, 하노버 국왕
프레더릭1763년 ~ 1827년요크와 올버니 공작
윌리엄 4세1765년 ~ 1837년영국 국왕, 하노버 국왕
샬럿1766년 ~ 1828년뷔르템베르크 왕비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
에드워드1767년 ~ 1820년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오거스타 소피아1768년 ~ 1840년
엘리자베스1770년 ~ 1840년헤센-홈부르크 방백비 (프리드리히 6세와 결혼)
어니스트 오거스터스1771년 ~ 1851년하노버 국왕, 컴벌랜드 공작
오거스터스 프레더릭1773년 ~ 1843년서식스 공작
아돌푸스1774년 ~ 1850년케임브리지 공작
메리1776년 ~ 1857년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부인
소피아1777년 ~ 1848년
옥테이비어스1779년 ~ 1783년유아기에 사망
앨프레드1780년 ~ 1782년유아기에 사망
아멜리아1783년 ~ 1810년


3. 2. 가족 관계

조피 샤를로테의 아들 중 하노버를 물려받은 다섯째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의 남자 직계 후손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어 영국의 왕위 계승권은 박탈된 상태이다.

또한, 넷째 아들 윌리엄 4세의 사생아 후손들은 영국에 거주하고 있다.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자녀'''
이름생몰년주요 직위 및 정보
조지 4세1762년 ~ 1830년영국 국왕, 하노버 국왕
프레더릭1763년 ~ 1827년요크와 올버니 공작
윌리엄 4세1765년 ~ 1837년영국 국왕, 하노버 국왕
샬럿1766년 ~ 1828년뷔르템베르크 왕비
에드워드1767년 ~ 1820년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오거스타 소피아1768년 ~ 1840년
엘리자베스1770년 ~ 1840년헤센-홈부르크 방백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1771년 ~ 1851년하노버 국왕, 컴벌랜드 공작
오거스터스 프레더릭1773년 ~ 1843년서식스 공작
애돌퍼스1774년 ~ 1850년케임브리지 공작
메리1776년 ~ 1857년글로스터 공작 부인
소피아1777년 ~ 1848년
옥타비어스1779년 ~ 1783년
앨프레드1780년 ~ 1782년
아멜리아1783년 ~ 1810년


4. 왕비로서의 삶

결혼 당시 샬럿은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으나, 빠르게 습득하여 강한 독일식 억양으로 영어를 사용했다. 한 관찰자는 "처음에는 수줍어하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을 많이 한다"고 평했다.

조피 샤를로테 여왕과 두 아들, 요한 조파니, 1765


1762년 8월 12일, 결혼 1년이 채 안 되어 첫 아이인 웨일스 공 조지를 낳았다. 부부는 총 1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11] 이 중 옥타비우스 왕자와 앨프레드 왕자를 제외한 13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12]

세인트 제임스 궁전이 공식 거처였지만, 부부는 인근의 버킹엄 하우스를 더 선호하여 1762년경 그곳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사적인 휴식 공간으로 여겨졌고, 샬럿 왕비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여왕의 집(The Queen's House)'으로 불리게 되었다. 1775년 의회 법령에 따라 샬럿은 서머싯 하우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가로 버킹엄 하우스를 소유하게 되었다.[13] 자녀 대부분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나, 공식적인 왕실 행사는 여전히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열렸다.[14]

1767년, 프랜시스 코티스가 그린 샬럿 여왕과 장녀 샬롯 공주의 파스텔화. 메리 코크 부인은 이 그림이 "너무 닮아서 다른 사람으로 오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국 생활 초기에 샬럿은 시어머니인 오거스타 공비와의 불편한 관계로 궁정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4] 오거스타는 엄격한 궁정 예절을 강요하며 샬럿의 사회 활동을 제약했고,[4] 샬럿의 시종 다수를 직접 임명하여 그들의 행동을 보고받기도 했다.[4] 이로 인해 샬럿은 주로 율리아네 폰 슈벨렌베르크와 같은 독일 출신 측근들에게 의지하며 교류했다.[4]

남편 조지 3세는 시골 생활과 승마를 즐겼으며, 격식 없는 편안한 가정생활을 선호했다. 이 때문에 왕가는 당시 시골 지역이었던 와 리치몬드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는 엄격한 궁정 의례를 중시하는 일부 인사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메리 코크 부인은 1769년 왕 부부가 하인 없이 리치몬드를 산책했다는 소식에 "여왕이 시내를 혼자 걷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마음이 만족스럽지 않습니다."라며 불쾌감을 표하기도 했다.

1778년부터 왕가는 윈저 대공원 내 새로 지어진 퀸스 로지(Queen's Lodge)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국왕은 그곳에서 사슴 사냥을 즐겼다.[15] 샬럿 왕비는 이곳의 실내 장식을 맡았는데, 왕실 가족의 친구이자 일기 작가인 메리 델라니는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눈부셨으며, 아름다운 인도식 벽지, 가장 생생한 색상의 다양한 자수로 덮인 의자, 유리, 테이블, 벽걸이 등이 있었고, 가장 훌륭한 취향으로 꾸며져 있어 그 장소에 최고의 쾌활함을 선사했다."고 묘사했다.

샬럿은 자녀들을 돌보는 이들에게 친근하게 대했으며, 이는 딸의 보조 가정교사였던 메리 해밀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 나의 친애하는 해밀턴 양,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사실 별로 할 말이 없어요! 하지만 내가 당신과 함께 앉아 읽는 즐거움을 누렸던 예쁜 파란색과 흰색 방에서 좋은 아침을 빌어주고 싶어요. 나는 올 여름에 두 번이나 읽었던 시인 ''은둔자''가 아주 마음에 드는 시입니다. 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시인이나 시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샬럿 여왕의 초상화 (1779년, 조슈아 레이놀즈 작)


샬럿은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남편 조지 3세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국왕을 통해 정보를 얻고 관직 후보자를 추천했으며,[16] 특히 독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779년에는 자신이 추천한 인물이 관직 매매 의혹에 휩싸이자 오빠에게 관련 서신을 불태우도록 요청할 정도로 신중하게 행동했다.[16] 그녀는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1778–1779)에 관심을 가졌고, 1785년 요제프 2세와 카를 테오도어 사이의 분쟁에 영국이 개입하도록 국왕을 설득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16]

예술과 과학 분야 후원에도 힘썼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어린 모차르트를 후원했으며, 식물 애호가로서 큐 가든 설립에도 기여했다. 또한 웨지우드 도자기를 구입하고 '퀸스웨어(Queen's Ware)'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왕과의 가정 생활은 원만했으며 남편의 여성 문제로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자녀들의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남편과 함께 고심했으며,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인 남편 조지 3세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며 말년에는 런던을 떠나 윈저 성에서 함께 지냈다.

1818년 11월 17일 향년 74세로 사망했으며, 윈저 성 내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5. 조지 3세의 투병과 섭정

1765년 조지 3세가 처음으로 일시적인 정신 질환을 겪었을 때, 시어머니와 뷰트 백작은 샬럿 왕비가 이 상황을 알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 통과된 1765년 섭정 법안은 국왕이 영구적으로 통치 불능 상태가 될 경우 샬럿 왕비가 섭정이 되도록 규정했지만, 시어머니와 뷰트 백작은 이 조항에 반대했다. 국왕의 병이 일시적이었기에 샬럿 왕비는 병 자체도, 섭정 법안의 내용도 알지 못했다.[4]

1788년, 국왕의 신체적, 정신적 질환이 심각해지자 샬럿 왕비는 큰 고통과 공포에 시달렸다. 당시 왕비의 시녀였던 작가 프랜시스 버니는 왕비가 "절망적인 소리"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고 혼잣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어느 날 밤 국왕이 쓰러졌을 때, 왕비는 그와 단둘이 있기를 거부하고 별도의 침실을 요구하여 얻어냈다. 의사 리처드 워렌이 호출되었을 때도 왕비는 통보받지 못했으며, 그와 상의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웨일스 공으로부터 국왕이 큐로 옮겨질 것이며 자신은 퀸스 하우스나 윈저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왕비는 국왕과 함께 큐로 가겠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큐에서도 왕비와 딸들은 국왕과 분리되어 격리된 채 지내야 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국왕을 방문했지만, 국왕이 그들을 껴안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경향 때문에 방문은 순탄치 않았다.[4]

말년의 샬럿 여왕, 슈뢰링의 1807년 작, 왕립 컬렉션


1788년 국왕의 투병 기간 동안, 섭정 자리를 둘러싸고 샬럿 왕비와 웨일스 공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다. 샬럿 왕비는 아들인 웨일스 공이 워렌 박사와 결탁하여 국왕을 정신 이상자로 선언하고 섭정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고 의심했다.[4] 반대로 웨일스 공의 지지자들, 특히 길버트 엘리스 경 등은 샬럿 왕비가 프랜시스 윌리스 박사와 소 피트 총리의 도움을 받아, 일단 국왕을 정상으로 선언했다가 다시 병이 악화되면 자신이 섭정이 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4] 워렌 박사는 윌리스 박사가 샬럿 왕비의 지시에 따라 자신에게 국왕을 정상으로 선언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

1789년 통과된 섭정 법안은 국왕이 영구적으로 정신 이상 상태가 될 경우 웨일스 공을 섭정으로 선언했지만, 국왕 자신과 궁정, 그리고 미성년 자녀들의 후견은 샬럿 왕비에게 맡겼다.[4] 샬럿 왕비는 이 법안을 근거로, 1789년 봄 국왕이 일시적으로 회복된 후에도 웨일스 공이 국왕을 단독으로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4] 섭정을 둘러싼 갈등은 모자 관계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4] 웨일스 공은 어머니가 자신의 정적들과 한편이 되었다고 비난했고, 샬럿 왕비는 아들을 국왕의 적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4] 이들의 불화는 샬럿 왕비가 국왕의 회복을 축하하는 콘서트에 아들을 초대하지 않으면서 공개적인 스캔들로 비화했다.[4] 이 시기 샬럿 왕비는 부자연스러운 어머니이자 총리의 꼭두각시로 묘사되는 풍자 만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7] 1789년 1월 ''더 타임스''는 야당이 "사적인 대화뿐 아니라 인쇄물을 통해서도 여왕에 대한 가장 악의적인 공격"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8] 샬럿 왕비와 웨일스 공은 1791년 3월, 샬럿 왕비의 제안으로 마침내 화해했다.[4]

호 제독과 함께 HMS ''퀸 샬롯''에 탑승한 조지와 샬롯, 1794


국왕의 정신 질환이 점차 영구적인 상태로 악화되면서 샬럿 왕비의 성격도 변해갔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변했으며, 한때 매우 즐겼던 음악회 등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더 이상 즐기지 않게 되었다. 성인이 된 자녀들과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졌다. 1792년부터는 남편에 대한 걱정에서 잠시 벗어나 윈저 성 내 프로그모어 하우스에 새로 마련된 거처의 정원을 가꾸고 장식하는 일에서 약간의 위안을 찾았다.[19]

1804년 이후 국왕의 정신 건강이 다시 악화되자, 샬럿 왕비는 침실을 따로 썼고 식사도 별도로 했으며, 국왕과 단둘이 만나는 것을 피했다.[4]

1811년, 조지 3세가 결국 영구적인 정신 이상 상태에 빠지자, 1789년 섭정 법안에 따라 샬럿 왕비가 그의 법적 보호자가 되었다.[4] 하지만 국왕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때때로 나타나는 폭력적인 반응 때문에 왕비는 남편을 자주 찾아갈 수 없었다. 1812년 6월 이후로는 더 이상 남편을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샬럿 왕비는 노년에 접어들면서 악화되는 남편의 병세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아들인 섭정 왕세자가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는 동안, 샬럿 왕비는 1811년부터 1818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남편의 법적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국왕의 병세는 매우 심각하여 아내의 죽음조차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했다.[42]

아들이 섭정을 하는 동안, 샬럿 왕비는 섭정 왕세자와 그의 아내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의 관계가 소원했기 때문에, 왕실을 대표하는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해야 했다.[4] 예를 들어, 1814년 나폴레옹 황제의 패배를 축하하기 위해 런던에서 열린 축제에서는 아들과 함께 공식 연회의 안주인 역할을 했다.[4] 또한 손녀인 웨일스 공녀 샬럿의 양육을 감독하기도 했다.[4]

말년에 접어들면서 샬럿 왕비의 인기는 점차 떨어졌고, 때로는 대중의 시위 대상이 되기도 했다.[4] 1817년 4월 29일 런던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후 돌아가는 길에는 군중으로부터 야유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국가에 봉사한 후에 이러한 대우를 받는 것이 매우 마음 아프다고 토로한 것으로 전해진다.[4]

6. 예술과 식물학 후원

샬럿 여왕과 남편 조지 3세는 독일 취향을 가진 음악 감정가였으며, 특히 독일 예술가와 작곡가를 높이 평가했다. 부부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음악을 열렬히 숭배했다.[20] 여왕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후원자로도 알려져 있다.

1764년 4월, 8세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유럽 일주 중 영국을 방문하여 1765년 7월까지 머물렀다.[21] 모차르트 가족은 5월 19일 궁정에 초대받아 연주했는데, 이때 여왕의 음악 교사였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모차르트에게 헨델, J. S. 바흐,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의 어려운 곡들을 연주하게 했다. 모차르트는 모든 곡을 즉석에서 초견으로 연주하여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22] 이후 어린 모차르트는 여왕이 부르는 아리아에 반주를 하고 플루트 독주를 선보였다.[23] 1765년 1월 18일, 모차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여섯 개의 소나타(작품 3)를 여왕에게 헌정했고, 여왕은 그에게 50 기니를 선물했다.[24]

샬럿 여왕은 식물학자이기도 했으며, 큐 왕립 식물원 설립과 확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제임스 쿡 선장과 조지프 뱅크스 경과 같은 탐험가들이 새로운 식물 종과 품종을 가져오던 시대에, 그녀는 큐 왕립 식물원의 소장품이 풍부해지고 확장되도록 기여했다.[25] 그녀의 식물학에 대한 관심 덕분에 남아프리카의 꽃인 극락조화는 그녀를 기려 ''Strelitzia reginae''라는 학명을 갖게 되었다.[26]

또한 샬럿 여왕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영국과 그 식민지에 도입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27] 처음에는 고향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풍습에 따라 주목 가지 하나를 장식하여 크리스마스를 기념했다.[28] 그녀는 시녀들과 함께 가지를 장식하고 궁정 사람들과 캐롤을 부르며 선물을 나누었다.[27] 1800년 12월, 샬럿 여왕은 윈저 퀸스 로지에서 영국 최초로 알려진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웠다.[27][29] 그해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여왕은 윈저의 모든 아이들을 초대했고, 거실에는 틴셀, 유리, 장식구, 과일 등으로 장식된 나무 한 그루를 두었다.[27] 파티 참석자 존 왓킨스는 여왕의 전기에서 이 나무를 "가지에는 설탕 과자, 종이에 든 아몬드와 건포도, 과일과 장난감 묶음이 가장 멋지게 배열되어 있었고, 전체는 작은 밀랍 촛불로 빛났다"고 묘사했다.[27] 이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관행은 영국 귀족과 젠트리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고, 이후 식민지로 퍼져나갔다.[27][27]

왕실 부부가 선호하는 다른 예술가 및 장인으로는 가구 제작자 윌리엄 바일, 은세공인 토머스 헤밍, 조경 디자이너 캐퍼빌리티 브라운, 그리고 독일 화가 요한 조파니 등이 있었다. 조파니는 샬럿 여왕과 아이들의 모습을 매력적이고 격식 없는 장면으로 자주 그렸다.[30] 샬럿은 도자기에도 관심을 보여, 웨지우드의 도자기를 구입하고 "퀸스웨어"라는 칭호를 허가했으며, 1788년에는 우스터 도자기 공장(나중에 로열 우스터로 알려짐)을 방문하여 "로열 릴리" 패턴(후에 샬럿을 기려 이름 변경)과 "샬럿 여왕" 패턴의 도자기를 주문했다.[31]

7. 유산과 혈통 논란

큐 팰리스에 전시된 샬럿 여왕의 장례 문장. 남편인 조지 3세 국왕보다 먼저 사망했기에 오른쪽은 검정색, 왼쪽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샬럿 왕비는 1818년 11월 17일, 74세의 나이로 서리(Surrey)에 있는 왕실 별장인 더치 하우스(현재의 큐 팰리스)에서 사망했다. 당시 장남인 섭정공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43] 그녀는 윈저 성 조지 예배당에 안장되었으며,[44] 남편 조지 3세는 1년 남짓 후에 사망했다. 샬럿은 1761년 9월 8일 결혼하여 1818년 11월 17일 사망할 때까지 총 57년 70일 동안 왕비 자리에 있었으며, 이는 영국 왕실 역사상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에 이어 두 번째로 긴 배우자 재위 기간이자, 여성 배우자로서는 가장 긴 기록이다.[45]

사망 전날, 샬럿은 남편의 비서인 서 허버트 테일러에게 유언장을 작성하게 했고, 그와 아덴 경을 유언 집행자로 임명했다. 사망 당시 그녀의 개인 재산은 약 14만파운드로 평가되었으며, 대부분은 보석이었다.[46] 1819년 1월 8일에 증명된 유언장에 따르면, 남편에게서 받은 보석은 남편이 정신 이상 상태에서 회복될 경우 그에게 돌려주고, 그렇지 않다면 하노버 왕가의 가보로 남기도록 했다. 아르코트의 나바브가 선물한 것을 포함한 다른 보석들은 생존한 딸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도록 했다. 프로그모어에 있는 왕실 거주지의 가구와 비품 등은 딸 아우구스타 소피아에게 프로그모어 재산과 함께 물려주되, 유지 비용이 부담스러우면 왕실로 귀속되도록 했다. 딸 소피아 공주는 로열 로지를 상속받았다. 샬럿이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에서 가져온 특정 개인 자산은 그 가문의 상속인에게, 나머지 책, 린넨, 미술품, 도자기 등은 살아남은 딸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도록 했다.[46]

샬럿의 사망 후, 그녀의 보석 소유권을 둘러싸고 오랜 분쟁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섭정공(조지 4세)이, 그의 사후에는 윌리엄 4세가 보석을 요구했다. 윌리엄 4세 사후에는 샬럿의 손녀인 빅토리아 여왕과 샬럿의 생존한 장남이자 하노버 왕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사이에 분쟁이 격화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보석이 영국 왕실의 재산이라고 주장했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는 하노버 왕가의 최고령 남성 후계자로서 권리가 있다고 맞섰다. 이 분쟁은 에른스트가 살아있는 동안 해결되지 못했다. 결국 1858년, 샬럿 사망 후 거의 40년, 윌리엄 4세 사망 후 20년 이상이 지나서야 에른스트의 아들인 게오르크 5세에게 유리하게 결정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은 보석을 하노버 대사에게 인도했다.[47]

샬럿의 나머지 재산은 1819년 5월부터 8월까지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판매되었는데, 여기에는 그녀의 옷, 가구, 심지어 코담배까지 포함되었다.[48] 그녀의 남편 조지 3세는 시력과 청력을 잃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기에, 샬럿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14개월 후에 사망했다.[49]

=== 아프리카계 혈통 논란 ===



1761년 앨런 램지의 샬롯 여왕 초상화. 이 초상화는 혈통 논란의 근거 중 하나로 제시되기도 했다.


샬럿 왕비가 부분적으로 아프리카계 혈통을 가졌을 수 있다는 주장은 1929년 독일 역사가 브룬홀드 슈프링거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그는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초상화가 부정확하다고 주장하며, 앨런 램지의 다른 초상화와 동시대 외모 묘사를 근거로 샬럿의 "넓은 콧구멍과 두꺼운 입술"이 아프리카 유산을 나타낸다고 결론지었다.[73] 자메이카계 미국인 아마추어 역사가 J. A. 로저스 역시 1940년 저서에서 슈프링거의 견해에 동조하며 샬럿이 "물라토" 또는 "흑인"이라고 주장했다.[74][75][97][72][27]

이 주장의 지지자들은 샬럿의 손녀 사위인 레오폴드 1세의 개인 주치의였던 스톡마 남작이 남긴 일기 내용도 근거로 삼는다. 스톡마는 1816년, 샬럿 사망 2년 전에 궁정에 도착했는데, 일기에서 샬럿을 "작고 구부정하며, 진짜 물라토 얼굴"이라고 묘사했다. 다만, 스톡마는 샬럿의 자녀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묘사를 남겼다.[76]

1997년, 족보학자이자 "독립 연구원"을 자처하는 마리오 데 발데스 이 코콤(Mario de Valdes y Cocomes)이 PBS의 프로그램 프론트라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 주장을 다시 대중화했다.[77][78][79] 그는 앨런 램지의 1761년 초상화를 근거로 샬럿의 "분명한 아프리카 외모"와 "흑인종의 용모"를 언급하며, 이러한 특징이 15대 조상인 마드라가나(13세기 포르투갈아폰수 3세의 정부)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했다.[79][84] 발데스는 마드라가나가 역사 기록에서 무어인[85] 또는 모자라브인[86]으로 묘사된 것을 근거로 그녀가 흑인이었다고 해석했지만, 이는 역사적 맥락을 오해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90]

이러한 아프리카계 혈통 주장은 대중적인 흥미를 끌었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87][75][88][89][90] 학계의 주요 반박 논거는 다음과 같다:

  • 샬럿 생전에 그녀가 아프리카계 신체 특징이나 혈통을 가졌다는 기록은 스톡마 남작의 개인적인 묘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89]
  • 당시 초상화는 모델의 실제 외모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보기 어려우며, 특정 화가의 화풍이나 주문자의 의도가 반영될 수 있다.[89]
  • 중세 시대에 "무어인"(Moor영어)이라는 용어는 주로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을 지칭하는 종교적, 문화적 구분이었지, 특정 인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91][92]
  • 마드라가나는 무슬림이 아닌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도인 모자라브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93][94][95][96]
  • 유전학적으로 15세대 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형질은 매우 희석되어 외모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다.[88][90]


역사가 앤드루 로버츠는 이 주장을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리"(utter rubbish영어)라고 일축하며, 이러한 주장이 대중적으로 퍼진 이유 중 하나로 역사가들이 문화적 위축(Cultural cringe영어) 현상 때문에 공개적으로 반박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87]

2017년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약혼 발표 이후, 메건 마클이 혼혈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샬럿 왕비의 혈통 논란이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80][97][98] 이에 대해 버킹엄 궁전 대변인 데이비드 벅(David Buck영어)은 ''보스턴 글로브''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은 수년 동안 소문으로 떠돌아다녔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문제이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99] 2023년 넷플릭스 드라마 ''퀸 샬럿: 브리저튼 스토리''에서는 배우 인디아 아마르테피오가 혼혈인 샬럿 왕비 역을 연기하여 이 논란을 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100][101][102]

8. 대중문화

샬럿 왕비는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시리즈를 통해 현대 대중문화에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 브리저튼 (2020년 12월 25일 ~ , 미국, 넷플릭스 배급, 원작: 줄리아 퀸)에서는 배우 Golda Rosheuvel영어이 샬럿 왕비 역할을 맡았다.
  • 퀸 샬롯: 브리저튼 이야기 (2023년, 미국, 넷플릭스 배급)는 브리저튼의 프리퀄 시리즈로, 젊은 시절의 샬럿 왕비를 주인공으로 다룬다. 이 시리즈에서는 배우 India Amarteifio영어가 혼혈인 샬럿 왕비를 연기했다.[100][101][102] 이는 과거부터 제기되어 온 샬럿 왕비의 아프리카계 혈통 논란과 관련하여 다시금 화제가 되었다. 비록 학계에서는 이 주장을 대체로 받아들이지 않지만,[87][75][88][89][90] 드라마는 이러한 논쟁적인 부분을 극적인 요소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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